차량의 붉은색과 대조되는 짙푸른 색의 정장이 굵은 몸에 감겨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손을 들어 올린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매끈한 가죽 시트 위를 더듬는다. 가죽 시트를 쓸어내리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낸 손이 핸들을 가볍게 그러쥔다. 룸미러에 비친 얇은 입술이 미소를 머금고 잘 닦인 구두가 액셀을 밟는다.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고 출발한 차량이 희뿌연 흙먼지를 날리며 빈 도로를 달린다. 차량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정도 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보닛으로 태양빛이 반사되고 도로 위에 기다란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차가 멈춰 선다. 차 문이 열리자 남자가 바람에 날린 새카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린다. 그리고 들리는 슬레이트 소리. 차량에서 내린 남자가 곧장 모니터 화면으로 향한다.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모니터에 비치는 제 모습을 확인하느라 찌푸려진다. 정리된 손톱이 습관처럼 선이 굵은 턱가를 두드린다. 재생되던 영상이 종료되면 남자가 눈동자만 움직여 바로 옆에 앉은 감독의 얼굴을 바라본다. 감독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나오면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 수고하셨습니다. " 듣기 좋은 목소리와 눈을 누그러트린 미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악수를 하고는 감독을 향해 입을 연다. " 일정이 있어서 곧바로 가보겠습니다. 뒤풀이는 마음으로 참석할게요. " 남자의 말에 괜찮다는 듯 가보라는 손짓을 하는 감독. 짧게 주변을 향해 인사를 하던 남자는 등을 돌리고 촬영지 밖으로 향하자 한숨을 내뱉고 신경질적으로 매니저를 부른다. " 피곤하니까 바로 집으로 가죠. "
" 시원 씨도 가끔은 좀 뒤풀이도 참석하고 그래요. 안 가는 게 나쁜 건 아닌데 감독님들이 계속 저한테 부탁해서···." " 그 정도는 알아서 하시죠. 저한테 말하지 말고. " 침묵 속에서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잘라낸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남자가 눈을 감고 차 시트에 몸을 기댄다. 조금 전 촬영장에서 보이던 미소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배우 윤시원은 2003년 데뷔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대중에게 각인시켜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대중에게 보이는 공석에서의 이미지는 늘 바르고 젠틀했지만, 사석에서 남자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매니저는 가능한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 번의 조금 전의 한마디로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듯 보였다. 높은 타워팰리스의 지하주차장에 멈춰 선 차량. 재킷만 챙겨 들고 내리던 남자가 건조한 시선만 돌려 매니저를 향해 짧게 말을 뱉어낸다. " 매니저 바뀔 테니까 차는 회사로 가져다 놔요. "
말을 마친 남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휴대폰을 든다. 짧은 통화,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찌푸린 표정. 한눈에 보아도 불쾌함이 역력한 그 표정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사람을 마주치자 곧바로 웃는 낯으로 바뀐다. " 안녕하세요. " 조금 전 통화 중일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의 인사. 남자는 눈치가 빨랐고 타고난 연기력이 좋아 몸이 피로하고 예민한 상태로도 친절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그 모습은 어디까지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하는 타인의 앞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소속된 회사와 매니저, 오래 알고 지낸 동료 배우들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남자의 신경질적인 성격은 타인을 향해 발산한다고 해서 쉽게 누그러지는 것이 아니었고, 발산할수록 오히려 가시를 돋게 만들어 스스로만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스케줄이 끝나면 매니저를 재촉해 집으로 돌아갔고, 가능한 일과 관계된 사람과는 사석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지금처럼 최대한 빨리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데뷔 후 15년째 철저한 이미지 관리와 언론플레이로 만들어낸 남자의 이미지는 단단하게 굳혀져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15년째 남자는 집이 아닌 바깥에서는 늘 연기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쌓인 스트레스가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것과도 같았다.
남자의 이미지 관리와는 별개로 남자와 직접 부딪히는 방송가에는 남자의 이러한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제법 되었다. 아무리 겉에서 잘 웃고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본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바뀌는 매니저와 남자의 이전 소속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내용들로 퍼지는 소문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덕에 앞뒤가 다른 안하무인 한 배우로 몇 번인가 기자들을 통해 저격을 당하기도 했었으나 남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타인의 입을 통해 들리는 자기 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는 탓도 있지만,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 가장 아래에 가득 차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만과 자신이 그 정도 소문에 남자 자신의 커리어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남자의 전화가 울리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 [ 윤시원 너 야, 너 또 매니저한테···! ]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곧장 통화를 끊는다. 그리고 곧장 다시 걸려오는 전화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받는다. " 적당히 합시다. 짜증 나니까. "